크레미궁
장르: C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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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흘러 몸을 적십니다.
마치 누군가가 당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듯이.
“지휘자, 헤스터 크롬웰.”
“명령이다. 당장 유물을 내려놓고 복귀하도록.”
당신의 손에서는 투명한 보석으로 된 상자가 들려있습니다.
당신은 기억할 겁니다, 이것을 훔쳐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했던가요.
그리고 이 행동이 얼마나 당신답지 않은 일이었는지도요.

대형 크리쳐를 토벌해서 얻은 유물, 대상 하나의 외상과 내상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는 희귀 아이템.
당신과 당신의 파트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혈투 끝에 얻은 이 물건을, 당신은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훔쳤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또 병동을 탈출했는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낯짝으로 비틀거리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저 바보 때문입니다.

어서 돌아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겁니까.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관리할 줄 모르는 짜증나기 짝이 없는 최악의 파트너같으니.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은, 전부 너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그저 내 선택으로, 내 독단으로 벌이는 일이니까.

너와 나는 페어야.

무기와 천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숨을 삼킵니다.


... ...
기준치: | 50/25/10 |
굴림: | 53 |
판정결과: | 실패 |
(행운 3 소비합니다)
부드럽게 몸을 짓누르는 중력.
이 땅을 딛고 있는 이라면 만고불변의 법칙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페어는 이를 악물고 그 힘을 거슬러 일어서려 합니다.
뼈가 비틀리고, 근육이 짓이겨지며 입가에서 선혈이 흐릅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형형한 눈빛이 당신을 향합니다.


(내장이 뒤틀리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지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다. 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이유는 고통보다 이 상황에 동요하는 저 물렁한 이의 눈빛 때문이겠지.)
지금까지 네가 소중하게 키워온 캐리어를 던져버리면서까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일은.. .(이를 악물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아니지.

이것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듣고 싶지 않아.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했다. 느슨해졌던 압력이 한층 강해진다.)

(제 삶보다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어.
나도 살고 싶었어. 네 곁에서 살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단 말이야...
묵직한 중력에 미르딘의 몸이 짓눌립니다. 이 정도라면 그도 일어날 수 없겠죠.


(지척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바닥에 짓눌린 미르딘을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옷깃을 붙잡아 끌어올린다.)
(과중력에 의해 상자의 자물쇠는 이미 파괴된 채. 안쪽의 투명한 보석을 반대쪽 손에 쥐고, 너를 밀어 넘어뜨렸다. 간단하게 그 필사적인 저항을 압살하고, 네 가슴 쪽에 그 보석을 가져다 댄 채, 손을 올린다.)



당신의 손에 들린 보석의 빛은 찬란하고 따뜻합니다.
눈이 멀정도로 눈부신 빛은 주위의 모든 것과 동떨어져서 쓸쓸하게 까지 느껴집니다.
그 빛이 점차 넓게 퍼지더니, 미르딘의 몸을 덮습니다.

빛 때문에 불분명한 시야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에 기적과 같은 활기가 담긴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비통하고 절박했다는 것도.

너를 상처준 나에게 복수하고 싶었어?
그래서 소중한 것을 잃고 증오에 미쳐가면서 살아가길 바랬어?
뚝,
당신과 ‘파트너’를 잇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지는 감각이 생생하게 듭니다.
이것으로 진정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겠죠.
그런데 왜 그는 저런 괴로운 표정을 하는걸까요.


... ...살고 싶었어. (자조적으로 웃는다. 생에 대한 집착을 이딴 최악의 방법으로 자각하게 되다니.)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은 바라지 않았어.
너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단 말이야!
끝까지 바보같은 녀석.
그래도 저 선명한 감정이 담긴 눈을 보니...
생에 대한 의지는 확실히 주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네요. 만족스러운가요?

너는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데엔 뭐가 있어.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무너뜨렸어.
절대 용서하지않아, 헤스터 크롬웰.

(중력은 세상을 유지하는, 물체를 공간에 잡아두는 힘. 그 극에 달한다면 공간에서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거나, 시간을 돌리는 것까지도 가능한다고 한다. 아무튼, 장면을 전환하는 데에는 이만한 것도 없다는 것.)
그렇습니다, 당신의 능력이면 이 곳에서 도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죠.

다신 보지 않는 거로 하지.
잘 있어, 미르딘 엠리스.

이대로 끝나는 것은 내가 용납하지 않으니까.
비통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은 중력의 틈으로 천천히 사라집니다.
눈 앞이 새하얗게 물들며 몸이 붕 뜨고 공간을 가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
그렇게 모든 것을 두고 떠난 당신은 …

새파란 하늘, 그리고 하늘을 담은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끝없이 푸름,
하늘이 어딘지, 또 바다와의 경계가 어딘지. 모호하고 아름다운 장소.
눈을 돌리면 하얀색 대리석과 자연의 녹음이 눈을 간지럽히는 곳.
당신은 지금 그리스에 있습니다.
미르딘의 병을 유물로 치료한 뒤 그대로 도주했던 당신은…
길고 짧은 추격전 끝에 끝내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능력자 대상으로 마련된 수용소에 며칠 간 투옥된 채 지내다가 본부의 명령이라는 말만 듣고 그리스까지 끌려오게 되었죠.
무슨 일인건지 물어봐도 명령을 위반한 전적이 있는 당신에게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세는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기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따라왔다.)
..가이딩을 며칠 간 받지않았더니 아무리 이능력 사용을 자제했다고 해도 눈 앞이 약간 어지럽네요.
푹신한 차 시트에 몸을 기댄 채 푸른색 하늘을 바라보며 이동하고 있으면
차는 어느새 부드럽게 코너를 돌아 높다랗고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가 마련된 주차장으로 이동합니다.
헤스터가 본래 소속되어있었던 뉴욕지부와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다만 위로 높았던 헤스터의 지부에 비하면 낮은 돔 형태의 건물에, 그리스답다고 해야할지 흰 건축물입니다.
두 개의 대리석 기둥을 세우고 세모난 조각을 올린, 신전의 문 같은 입구에…
확실히 다른 점은 지휘자와 안내자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쥐어짜인 것 같아 보이는 흰 가운의 연구원과 의사들만이 좀비처럼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도군요.
뭐지? 인력 부족인가?

차에서 내리면 지나가던 좀비.. 아니, 연구원이 약식으로 경례하고, 헤스터는 다른 요원들에게 연행되다시피 지부 건물로 들어섭니다.
흰 대리석 바닥은 깨끗하지만,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분주하고, 생각에 잠겨있거나, 피곤해 보입니다.
어수선하네요.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벽에 커다란 안내판이 붙어있습니다.

지상층은 1층, 2층, 3층, 4층으로 1층은 로비와 안내데스크, 지부장실, 소규모 의무실, 브리핑룸과 카페테리아 등으로 이뤄져 있고 2층은 운동실과 휴게실 3층은 대원들의 숙소와 체육관으로 통하는 육고, 4층은 헬기와 구조선 필드로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지하 1층은 식당과 편의시설, 지하 2층은 연구실로 사용 중인 모양으로 건물 뒤편에 드넓은 연병장, 딸린 건물로는 부대 병원과 체육관이 있습니다.

2 (1 와본 적 있다.. 2 없다)
(아테네 지부엔 완전히 처음이라 생소하지만 생소한 게 무슨 문제지? 어차피 여기에서 자신이 선택하여 어딘가에 있을 순 없을텐데. 신경 끄기로 한다...)
새하얀 대리석 복도를 걷고 있으면 창문 너머로 나무들이 보입니다.
잎사귀가 물방울을 머금은 것을 보니 곧 여름이겠군요.
햇살을 맞으며 걷다보면 눈 앞에 커다란 문이 보입니다.
당신을 데려온 사람들은 문 옆에 비켜섭니다. 아무래도 혼자 들어가야하나 보군요.

...
(옅은 한숨을 뱉고 문을 열어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깔끔하고 단정한 사무실 내부가 보입니다.
넓게 난 창문에서 아이보리색 햇볕이 들어오고 산뜻한 아쿠아향이 나는 것이 꽤 안온한 풍경의 지부장실이지만...
서류가 산처럼 쌓여있는 책상을 보니 마냥 안온하진 못한 모양이군요.

아테네 지부장인 루키오스 아나델이에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젊고 자상해보이는 인상의 청년입니다.
다만 눈 밑이 거뭇해보이는 걸 보니...많이 바쁜가보네요.




차는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커피파?

둘 다 됐습니다. 본론부터 말씀해주시죠.

휴가로 처리되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일단 지금까지는요.
(그리고 파일 하나를 내민다.) 며칠 전, 저희 지부에서 이런 서류를 뉴욕 지부에 보냈어요.

명분이 어떻게 되었든 전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저는 별 도움이 안될텐데요.
(전투 능력 인원이 사실상 제로. 그렇다면 가이딩을 할 만한 사람도 없다는 거겠지. 지금 상태로는 자신도 큰 전력이 되지 못한다. 만약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무력하게 잡히지 않았겠지.)

아테네 지부로서도 당신의 파견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는 안내자 한 명만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오기로 했던 그 안내자가 당신을 지목하더군요.
..유감스럽게도, 혹은 운이 좋게도.
뉴욕 지부에서는 이 임무가 특히 위험도가 높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지금까지의 실적을 높게 평가해 이번 임무에서 성과를 내면 지휘자로 복귀를 진지하게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아까운 인재를 감옥에서 썩힐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거죠.




...그 안내자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으시는군요.
당신과 새롭게 파트너가 될 사람인데, 신경쓰이지 않으십니까?


사건에 대해서 궁금한 점은 없나요?
(차를 홀짝이며 눈을 천천히 굴린다.)

(일단 안내자 프로필이나 읽어본다...뻔하지만.)
서류를 보면 익숙한 얼굴이 보입니다.
당신이 예상한 그대로군요.


(소형 위치추적기 버튼을 당신의 셔츠깃에 붙이고 자신의 지문을 등록해 잠근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오늘 낮에 엠리스씨가 공항해 온다고 합니다.
그 분을 마중하러 가신 후, 이 곳에 돌아오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죠. (씩 웃는다)

...마중까지 나가야 하나요? 피차 좋을 것도 없을텐데.





적어도 엠리스씨는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해서 인사를 마치고 복도로 나와, 공항으로 미르딘을 마중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새파랗던 하늘이 벌써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배경도 있겠지만..어지간히 집요하게 당신을 데려오라고 요구한 모양이군요.
당신의 '전' 파트너가요.

다 끝났는데, 뭘 또 하겠다고.
당신은 현재 몇 주간 가이드와의 접촉을 하지 못한 상태죠.
덕분에 갈증, 굶주림… 뱃속에서 들끓는 것들이 슬슬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완전히 끊은 인연과 다르게 지휘자로서의 본능은 불쾌하게도, 멋대로 그와의 접촉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공항에 도착하면,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풍경이 보입니다.
코드 레드가 아무리 극비라지만, 큰 사건이 일어난 것 치고 활기 넘치네요...

(마음과는 다르게 머리는 한층 차분해진다. 페널티가 무색하게도 무사히 도착하고 만다.)
(관광객들의 틈새를 지나, 게이트에 도착한다.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한 눈에 알아볼 자신은 있었다...)
용케 사고를 내지않고 공항의 로비로 향합니다.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있는 곳에서...
시선이 빨려들듯이 확실히 보이는 인영.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못 알아볼리가 없죠.
그리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나봅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의 뱃속에서 들끓던 지휘자로서의 본능이 그와 계약을 맺고 드러난 피부에 입술을 부비고 입을 맞추라 촉구합니다.
..심호흡을 하고 가라앉혀봅시다.

당신이 바라던, 바라지않던 그는 정갈한 걸음걸이로 다가옵니다.
여전히 피부는 창백하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건강해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되찾지 못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제 머리를 태평한 동작으로 쓸어넘기고) 그런 낯을 하는 걸 보니 너는 꽤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나보네.
갑자기 이 곳에 불려오니 불편한가봐.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조금이나마 나아졌다지만, 다른 갈망 때문에 마음은 오히려 폭풍 속 나룻배와 같은 상태.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 녀석에게 계약을 맺어 달라고 하는 건, 죽는 것보다 더 싫다...)
쓸데 없는 소리는 그 정도로 해 두고, 돌아가지.

몇 주 동안 가이딩을 받지 못한 것 아니었어? (눈썹 한 쪽을 살풋 찌푸리는 것이 사정을 모를 이가 본다면 진정 당신을 염려하는 것으로 보일만 했다. 가까이 있는 당신에게는 차갑게 식은 눈이 선명했지만.)
버티기 참 힘들텐데.. ..(당신의 긍지높은 성격을 알면서 부러 이죽거리는 것이 뻔했다.)
뭐, 상관없는 사람이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필요하면 헤스터가 말해줄거라 믿어. (입꼬리를 비틀고 웃으며) 운전 정도야 할게. 차 키 주겠니?

(사실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는다. 왜 네가 화를 내지?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는데. 네가 질 책임은 어떤 것도 없었는데. 물론, 이런 냉정한 사고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끝까지 차오른 갈증 때문에.)
(마른 침을 삼킨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안됐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정이 안 좋진 않아서.
(차 키를 넘겨주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지만...지금의 자신이라면 무슨 사고를 낼지 모른다. 떨리는 손끝을 애써 숨기고 키를 넘겨준다. 그리고 별 말 없이 출구로 향했다.)

(일부러 당신의 손을 한 번 쥐고, 키를 받아간다.) 잘 부탁해.
손에 익숙한 체온이 부드럽게 휘감깁니다.
그 체온은 몸에 간지럽게 퍼져나가고, 조금이나마 호흡을 편하게 해줍니다.
아주 미약하게 두통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미약한, 애를 태우는 안정은 도리어 지휘자로서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두 사람 다 파트너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미약하게 나마 가이딩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뻔히 이렇게 행동한거겠죠.


(피식 웃고 짐가방을 끌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조수석 문을 예의상 열어놓는다.)

차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공항을 빠져나갑니다.
저녁의 그리스. 노을이 벌써 뉘엿뉘엿 넘어가 붉게 물든 거리 속 사람들을 평화로워 보이는군요.
지금 당신의 상태에 비하면 누구나 평화롭겠죠.

아니면 나한테 물어볼 사항이나.


그 후로 미르딘은 아무 말 없이 운전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갈증은 언제나 파트너를 옆에 두고 있었던 당신에게는 낯설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편하지 않았을 시간이 몇 분 더 이어지고 나서야 아테네 지부 건물이 보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미르딘이 자기 짐을 들고 먼저 내립니다.


(어둑해져 남색 빛을 띠기 시작하는 하늘이 여전히 붉은 색으로 보였다. 이제 정말 한계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미약하게 들린다. 네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당신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몸을 낮춰 건물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
자, 이제 정말 계약을 해야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하니, 헤스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내가 없으면 미치겠다는 표정인데.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비웃음을 그린다.)
그런 낯을 할거면서 앞 뒤 안보고 잘도 떠났네.


(잡힌 팔을 뿌리친다.)
(이전보다 확연히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건강해졌더니 몸도 훨씬 다루기 쉬워졌어.
(제 손을 쥐었다가 천천히 피며 당신을 무감하게 본다) ..지금 누구 손을 잡고 있는지 알아?
피아구분 못할 때 해놓고 너인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거야- 따위의 말을 듣는 건 이제 지겨워서 말이지.
자, 헤스터. 제대로 부탁해야지.

(꽉 쥔 손의 안쪽을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온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져내린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던 각오도 갈증 앞에선 흐려지고 말고...)


...제발...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나는 네 굴욕적인 모습을 바란 게 아니야. 그저 네가 나를 제대로 인식하고 가이딩을 하길 바란거지.
다시 물어볼까, 내가 누군지 알겠어?
당신을 끌어안고 상반신이 겹치자 일순 호흡이 편해집니다.
시야가 조금 더 또렷해졌지만 갈증은 가라앉았다 다시 치솟기를 반복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기까지 온 건데.

그럼 피아식별 못하는 상태로 계약했으면 편했을까.
그게 더 너를 무시하고 자존심을 진창에 처박는 행위 아니겠니.
...계약한 안내자가 없으면 어떻게 될 줄 네가 모르진 않았을텐데 이렇게 엉망으로 지낼 생각으로 그 때 떠난걸까... (눈을 가늘게 뜬다. 떠났으면 잘 지내기라도 하지.)
이제 상대 누군지 구분할 정도의 시야는 확보한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물어볼까. 나와 계약하겠니?
뭐, 어차피 이 곳에 나 외에 멀쩡한 안내자는 없는 것 같지만.


왜 그렇게 나를 보니? 네가 선택한 일이었잖아.

(...자신이 미르딘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아무리 나아졌다고 해도, 폭주에 휘말리면 위험할지도 몰라...)


(다른 지휘자였다고 해도 이렇게 했을 거야. 그 말에는 표정을 찌푸린다.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정신에도 그 말은 따갑가 다가왔는지,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래, 쓸데없는 언쟁은 여기까지 해 둘까. 너는 계속 심술을 부릴 것 같고, 나로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계약할게. 됐지? (손을 내민다. 이젠 좀 순순히 응하라는 듯.)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했을거라는 것처럼 들리네. (아까부터 순순히 계약하지 않고 객기부리던게 누구였지, 눈썹을 까닥였지만 마찬가지로 굳이 물고늘어설 이유는 없었다. 순순히 손을 내민다.)

(천천히, 네 손을 들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내내 시선은 똑바로 네 눈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미르딘 엠리스와 계약하겠다고 하는 거야. 이제 만족해? 그런 항의를 하는 것처럼.)
(하지만 강한 척 하는 것도 거기까지. 안정감이 밀려오자 몸의 피로가 급격하게 해소되며 긴장이 풀린다. 무심코 고개를 숙여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숨을 쉰다는 건 이런 감각이었구나.)
미묘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 미르딘이 헤스터에게 손을 내밉니다.
내밀어진 손을 잡으면, 다소 뜨거운 상태인 헤스터의 체온이 미르딘의 체온과 뭉그러져 섞이며 숨이 밭게 죄어옵니다.
파트너쉽은 정신적 교류라고들 하죠.
헤스터가 천천히 미르딘의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면,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입술에 닿음과 동시에 한차례 얕은 소름 같은 것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몸을 타고 정수리로 오릅니다.
‘맺어지는’ 감각.
커다란 파도처럼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팍이 부풀고 어깨가 크게 오를 정도로 숨을 깊게 마셨다가 느리게 내쉽니다.
숨결이 닿은 손바닥으로 간질간질, 보드라운 입술에서 느른한 한숨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떤 견고한 유대로 서로가 묶였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감지됩니다.
두 사람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겠군요.

(처음 계약하던 순간에는 이보다 간지럽고, 강렬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제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당신을 한 팔로 끌어안고 부드럽게 등을 쓸어준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의 따뜻한 온기가 몸에 쏟아집니다.
비로소 당신은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아프게 울려대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고 고삐를 놓기 직전이었던 힘이 안정적으로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미르딘이 당신의 몸을 쓸고, 피부가 접촉할 때마다 더 안정되어갑니다.

(꽤 안정이 되어서야 한 발 물러난다. 타인이라기엔 가깝고, 파트너라기엔 먼 거리감.)

임시겠지만, 잘 부탁해.


